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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담임목사 박경근
2026년 6월 28일 설교 | 준비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2:1-14)

본문 창세기 22:1-14  ·  설교 박경근 담임목사  ·  2026년 6월 28일 주일예배

설교 요약

오늘 저는 창세기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붙들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이 본문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번제는 재물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양이 아니라 백 세에 얻은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명령이 결코 순종하기 쉬운 명령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소나 양 천 마리를 바치라 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부자였으니 고민 없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분신이요, 가정의 미래요, 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그런 이삭이 있습니다. “하나님,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것만은 안 됩니다” 하는 그 무엇, 어떤 이에게는 미래일 수도 있고 노후 자금일 수도 있고 자녀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바치라고만 하시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왜 이 시점에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 이유라도 알면 견딜 만한데, 이유를 모를 때 혼돈에 빠지곤 합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하나님, 이삭은 절대 안 됩니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괴로워했다는 말도, 고민하고 갈등했다는 말도, 도망쳤다는 말도 없습니다. 3절에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 쓸 나무를 준비해 떠났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순종을 미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산을 오르며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격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만 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아들을 결박해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결박은 짐승이 발버둥치지 못하게 손발을 묶는 것이요, 잡으려 했다는 말은 목을 친다는 뜻입니다.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내리칠 기세였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다급히 두 번 부르신 것입니다.

덮어 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펼쳐 놓고 믿는 믿음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도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 하셨고, 아브라함도 “내 아들아” 하고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그의 순종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바로 다음 23장에서 아내 사라는 오직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으로만 다시 등장합니다. 창세기가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슬픔과 고통을 굳이 적지 않은 것은, 로버트 알터 교수의 말처럼 가장 극적인 순간에 오히려 감정을 설명하지 않음으로 독자가 그 침묵 속에서 스스로 아버지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침묵이 웅변보다 강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순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신약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8-19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삭으로 말미암아 네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필요하면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라도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여기 “생각하다”라는 단어는 본래 회계 용어로, 계산기를 두들겨 따져 보았다는 뜻입니다. 은행이 크레딧을 조사하듯,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인지, 목숨을 걸어도 될 만한 분인지 다 따져 보았고, 그 결론은 “예스”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덮어 놓고 눈감고 아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가 하는 말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펼쳐 놓고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묵상한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말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박된 이삭을 향해 칼을 들었을 때 바로 그 약속 위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혹시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기 두렵고, 인생의 계산기를 두들겨도 답이 나오지 않아 밤잠을 이루지 못하신다면, 저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묵상하시라고 권합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하고,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우리가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답이 없고 막막할 때마다 잠언 3장 5-6절 같은 약속의 말씀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기 힘들 줄 아시고 명령 곁에 그토록 많은 약속을 붙여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13-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있었고, 그는 그 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준비하시다”로 옮겼지만, 이 단어는 본래 “보시다, 아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몇 달 전 저희 집 건조기가 잘 마르지 않아 아내가 힘들어할 때, 한 집사님이 “목사님, 제가 가서 한번 볼게요” 하셨습니다. 그 말은 뚜껑만 열어 본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오셔서 막힌 배기구의 먼지를 다 빼 주시니 한 시간 만에 마르더군요. “한번 볼게요”는 곧 “내가 해결해 볼게요, 도와줄게요, 책임질게요”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이 문제를 말하면 저도 모르게 답을 찾게 되는데, “아빠가 한번 볼게”라는 말도 필요하면 도와주고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이 보신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고민을 듣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내가 한번 볼게, 내가 도와줄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 아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를 가장 정확한 때에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박경근 목사

박경근 목사 (Rev. David Pak)

박경근 목사는 인디애나폴리스 한인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말씀 선포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서 전한 말씀을 이곳에서 설교 영상과 요약으로 다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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